2023년 6월 27일

오늘의 말씀

( 2023년 6월 27일)


* 일년일독: 시편 101-103편

* 매일성경읽기: 로마서 15:14-21절


[ 묵상요절 ]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편 103:8-17)


[ 나의 묵상 노트  ]


다윗은 시편 103편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자비를 찬양하고 있다.

시편 103편은 개인적으로 시편 23편 다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시편이다.


다윗의 찬양과 기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이름을 송축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오늘 내가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도 이와같은 하나님을 송축함을 더 많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악을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며,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 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다윗은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이라고 표현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왜 다윗은 ‘구원’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구속’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까? 이 ‘구속’ 이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다’ 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렐루야!


또한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고,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판단하신다’ 고 하셨다.

나의 나이와 환경, 여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오늘 말씀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치하지 않고, 죄악을 따라 갚지 않으신다. 이런 다윗의 고백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에 백성을 향한 사랑(자비)이 너무 커서 그 백성들의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신이 크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기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지구가 둥글다고 하여도 동과 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공간적 장소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동과 서가 서로 만날 수 없듯이 우리의 죄를 멀리 옮겨 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옮겨진 죄악을 다시 찾아 가지고 그것을 품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 죄악이 무슨 보화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오늘도 그것들을 찾기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이며, 손과 발이 분주히 움직여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 길이 멸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은 아닐텐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자녀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신다.

사실 우리의 인생의 날이 풀과 같고, 사람들이 수고하여 힘들게 얻은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풀과 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잠시 묵상해 본다. 들풀을 주의 하여 보는 사람은 없다. 혹시 밭에 난 풀이라면 곧 농부의 손에 뽑히는 존재가 되겠지만, 들풀은 그 누구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들꽃은 좀 나을까? 아름답게 피어난 들꽃은 한 번 지나는 사람들의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아니 ‘야 저 들꽃 예쁘다!’ 라는 감탄사를 들을 정도다. 그러나 거기 까지다.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피었다 지는 존재다. 그 위에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고 더 이상 그곳에 그 꽃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친다’ 고 선포하고 있다. 너무 크게 대조되어 나타나는 ‘순간’ 과 ‘영혼’에 대한 비교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이라는 이 하루의 삶의 시간 안에 어떠한 것을 위해 땀을 흘리며 열심을 낼 것인가? 아침에 피었다 지는 ‘들풀이나 들꽃’ 과 같은 이 땅의 순간적 영화를 위해 ? 아니면 영원에서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위해? 답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것을 붙잡고 나아가는 지는 나의 결단에 달려있는 것이다.


[ 오늘의 기도]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악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옮기는 구속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도 이 아들을 양자 삼아주셨으니 이 아들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이 종의 손을 붙잡아 주세요. 혹 나의 손이 주의 손을 잡고 있다 미끄러져 놓칠까 두렵사오니, 주께서 나의 손을 굳게 잡아 주세요.


순간의 기쁨과 행복, 부귀와 안일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영원한 것에 나의 마음을 다 쏟아 붙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